"간첩보다 조심해야하는 게 보험설계사입니다"
보험영업만 20년 넘게했다는 한 법인보험대리점(GA) 대표의 말이다. 다소 과격해 보이지만, 하루에도 수차례 마주한다는 '잘못 설계된 보험상품' 사례를 듣고나니 그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최근 적발된 '보험설계사 자격시험 대리응시' 사건은 보험산업 민낯을 드러냈다. 응시자 대신 시험을 봐준 대가로 10만~15만원의 수수료를 받고 설계사 자격증을 발급받게 해준 GA 대표와 알선자, 응시자 등 73명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피의자 대부분 혐의를 인정했지만, 이들에게 돌아간 처벌은 고작 '1년간 시험 응시 제한'에 그쳤다. 부정행위에 면죄부만 준 셈이다. 진입장벽은 무너졌고, 검증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보험설계사는 단순 판매직이 아니다. 고객은 설계사의 설명과 조언을 듣고 수십 년짜리 보험계약을 결정한다. 설계사 한 사람의 말과 판단이 가입자의 미래를 좌우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보험은 한 번 가입하면 쉽게 바꾸기 어렵고, 중간 해지 시 불이익도 크다. 보험설계사의 역할을 단순 영업직로 치부하기엔 영향력과 전문성이 결코 가볍지 않다.
제대로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설계를 할 경우 그 결과는 뻔하다. 불완전판매는 물론, 설명 부족으로 인한 분쟁과 민원, 심지어 보험사기로까지 이어질 심산이 크다. 고객을 돈벌이로만 생각하는 설계사가 간첩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나온 배경이다.
올해 상반기 보험설계사 시험 응시자는 12만명에 달한다. 특히 5월 응시자 수는 최근 10년 새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반면, 위촉 후 1년 이내 이탈률은 생보사 63.1%, 손보사 46.8%에 달한다. 단기 수당만 챙기고 떠나는 설계사가 늘고 있다는 얘기다.
이에 따른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매년 불완전판매 건수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일부 설계사는 고객 보험료를 빼돌리거나, 조직적으로 보험사기에 가담하는 수준까지 가고 있다. 금융감독원 통계를 보면 보험설계사가 연루된 보험사기 적발액은 2020년 155억6000만원에서 지난해 237억원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보험사기 적발인원도 1408명에서 2017명으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다수 보험사와 GA는 실적 중심 영업에만 몰두하며, 제재이력이 있는 설계사를 재위촉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행 보험업법상 사기죄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3년간 설계사 등록이 제한되지만, 그 이후에는 복귀가 가능해 재범의 온상이 되고 있다.
실제 105개 보험회사·GA 중 71곳이 제재이력을 무시하고 설계사를 다시 위촉했다는 금감원 조사결과도 이를 방증한다. 보험산업 불완전판매의 책임을 단지 개인 설계사의 윤리적 문제로만 치부하기 어려워 보인다.
처벌과 제재가 느슨하면 이들은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며 선량한 소비자를 속일 가능성이 높다. 일부 설계사로 인해 보험산업 이미지가 실추되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된다. 솜방망이 처벌을 거두고 구조적 개혁에 나서야 할 때다.
전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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