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칼이 사내근로복지기금에 자사주를 출연하며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의 그룹 지배력이 강화됐다. 이로써 호반그룹의 지분 확보 공세에 맞서는 조 회장은 호반과 우호 지분 격차를 30% 가까이 벌렸다. 이와 함께 조 회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상법 개정 대선 공약 중 하나인 ‘자사주 소각 제도화’가 시행되기 전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자사주 출연을 두고 주주 실익은 없고 지배력 강화를 위한 꼼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현 정부의 정책 기조에 역행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럼에도 조 회장은 상법 개정 전 경영권 방어를 위한 조치에 속도를 냈다. 상법 개정 이후 가로막힐 수 있는 경영권 방어 수단을 미리 마련한 셈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한진칼은 8월 14일 자사주 44만44주를 사내근로복지기금에 출연했다. 이는 한진칼이 올해 5월 열린 이사회에서 결의한 사항이다. 이번 자사주 출연으로 사내근로복지기금은 전체 발행주식의 0.66%를 확보하게 됐다.
한진칼의 자사주 출연 배경에는 의결권 확보 목적이 있다. 장내 매수 등으로 확보한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는 주식으로 분류돼 경영권 분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사주를 사내복지기금에 출연하면 해당 주식에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제3자인 사내복지기금이 독립 주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조 회장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내복지기금에 자사주를 넘김으로써 사실상 우군을 확보한 셈이다.
이번 출연으로 조 회장 측 지분은 20.02%에서 20.68%로 상승했다. 여기에 우군으로 분류되는 델타항공(14.9%), 산업은행(10.58%) 지분까지 합하면 우호 지분은 총 46.16%에 달한다. 반면 호반 측 지분은 18.46%로, 양측 간 지분 격차는 27.7%포인트(p)로 벌어졌다.
호반그룹은 앞서 한진칼 2대 주주인 호반건설을 비롯해 호반호텔앤리조트, ㈜호반을 통해 한진칼 지분을 18.46%까지 끌어올렸다. 한진칼 자사주 출연 이전에는 조 회장 측(20.02%)과 지분 격차가 1.56%p에 불과해 호반건설이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해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조 회장은 자사주 출연 외에도 LS그룹과 손잡고 경영권 방어망을 넓혔다. 한진그룹과 LS그룹은 올해 4월 동반성장·주주이익 극대화를 목표로 사업 협력을 강화하는 내용의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어 5월에는 LS그룹이 대한항공을 상대로 650억원 규모, ㈜LS 보통주식 38만7365주를 기초자산으로 한 교환사채를 발행했다. 대한항공이 이를 인수했으며, 5년 내 LS 주식으로 전환이 가능하다.
대한항공에 교환사채를 행사하고 LS그룹이 해당 주식만큼 자사주를 매각해 한진칼 지분을 확보하면 조 회장의 우호 지분은 더욱 확대될 수 있다. 두 그룹 모두 호반그룹의 지분 매입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 회장의 지배력 강화 행보에 비판도 이어졌다. 주주 이익을 침해하며 경영권 방어에만 몰두했다는 지적이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자사주 처분은 유상증자와 같은 성질인데 기부는 사실상 무상 공여에 해당한다”며 “이는 이사의 충실의무 위반에 해당한다”고 꼬집었다. 또한 한진그룹-LS그룹 협업과 교환사채 발행에 대해서도 “협업을 빌미로 자사주를 우군에게 매각해 지배권을 굳히는 것은 반칙”이라며 “지배권 방어는 높은 주가와 기업 가치 제고라는 정공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상법 개정안 입법을 앞둔 상황에서 한진그룹이 자사주를 조 회장 지배력 강화에 활용한 것은 지배주주의 자사주 편법 활용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재명 정부의 기업 가치 제고 정책과도 배치된다는 지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자사주 소각을 통한 기업가치 제고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는 지배주주가 경영권 방어를 목적으로 자사주를 특수관계인이나 제3자에 넘기는 행위를 막고, 자사주 소각을 촉진해 주주권 보호와 기업가치를 극대화하겠다는 취지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은 자사주를 원칙적으로 소각하도록 하는 상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이에 한진그룹은 법안 통과 전 조치를 취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다른 기업들은 자사주 소각을 늘리며 정부 정책 기조에 호응하는 분위기다. 대선이 치러진 6월 3일부터 8월 14일까지 코스피·코스닥 상장사의 주식 소각 공시는 총 45건으로, 전년 동기(30건) 대비 50% 증가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애플, 구글, 엔비디아, TSMC 등은 수십 년간 긴밀한 협업 관계를 유지했지만 자본 거래가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상호 주식을 보유하지 않았다”며 “자사주는 지배권 방어 수단이 될 수 없다. 이는 지배주주의 개인 자금이 아니라 회사 자금으로 매수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성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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