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1부 검사실 김진규 검사입니다.” 

챗GPT에서 생성한 이미지
챗GPT에서 생성한 이미지

지난 4일 오전 10시19분 정명호씨(33, 가명)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자신을 검사라고 소개한 그는 정씨에게 대뜸 대포통장 불법자금 세탁 사건에 연루됐다고 했다. ‘나의 사건조회’ 사이트 주소를 알려주며 사건을 조회해 보면 알 것이라 했다.

미심쩍었지만 혹시나 해 알려준 사이트에 들어가 사건번호 ‘2024 조사 2384호’를 검색했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화면엔 대포통장 불법자금 세탁 사건 내용과 본인 이름·주민등록번호, 검찰총장 날인, 지검장·합동수사본부 등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김 검사라는 사람은 해당 사건이 정씨 명의로 된 KB국민은행에서 대포통장이 발행돼 약식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자산, 대출 내역 등을 묻고는 휴대전화 공기계를 구매해야 한다고 했다.

정씨는 그가 소개한 서울 강서구 중고 스마트폰 판매점으로 가 삼성 갤럭시 스마트폰 하나를 구매했다. 김 검사는 정씨에게 김포공항 인근 L호텔로 이동하라고 지시했고 그곳에서 조사에 필요한 앱 ‘HOST’를 깔아야 한다고 했다.

호텔에 도착한 정씨는 알려준 앱을 공기계에 설치했다. 김 검사의 지시대로 본인 휴대전화(아이폰)에 있는 유심도 공기계로 옮겼다. 15분 정도 지났을까. 검사에게 전화가 왔다.

검사는 명의도용을 막기 위해선 금융감독원에 가 서명해야 하는데 진술 누락이 있어 출입 허가증을 발급해 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씨에게 구속될 수밖에 없다고 위협했고 정씨는 왜 구속돼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자 검사는 마치 선심쓰듯, 임시보호관찰장소를 지정해 주겠다며 일단 그곳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정씨는 김포 소재 A호텔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8일 오전까지 반성문을 쓰면서 지냈다. 정시마다 ‘2024 조사 2384호 정명호 현재 특이사항 없음’이라며 보고했다. 검사는 엠바고(비밀)를 지키고 외부 통화를 하지 말라고도 당부했다. 텔레그램으로만 대화를 했다.

검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보낸 허위의 대포통장 관련 검찰청 사건 내용. / 제보자 제공
검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보낸 허위의 대포통장 관련 검찰청 사건 내용. / 제보자 제공

8일 오전 다시 장소를 변경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 강서구 소재 D호텔로 이동하라고 했다. 이동 중 제3자에게 절대 말하지 말고 엠바고를 지키라고 당부했다. 그날 오후 금감원의 이종오 과장이라는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이 과장은 정씨에게 대부업체 ‘태강대부’라는 곳에서 1500만원 대출받은 적이 있냐고 물었다. 대출받은 적 없다고 답했으나 과장은 "매우 엄중한 사태"라며 피해자인증절차를 진행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씨 신한은행 계좌로 2500만원을 입금했다. 수사자금이고 수사 종결 후 돌려주면 된다고 설명했다. 신한은행으로 들어왔던 2500만원을 케이뱅크 계좌로 옮겨 업비트에서 리플 2500만원어치를 구매하라고 지시했다.

9일 밤 금감원 유희찬 대리라는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유 대리는 가상자산 전문가라고 소개하며 하라는 대로 따라오면 된다고 했다. 바이낸스와 Authenticator(인증 앱), 빗썸 등을 설치하라고 했고 업비트에서 구매한 리플과 정씨가 기존에 보유했던 리플 130만원어치도 함께 빗썸으로 옮기라고 했다. 이후 확인해 보니 빗썸으로 옮긴 리플은 매도됐다.

11일 오전 10시 김 검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금감원 3층으로 가서 자기를 찾아오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출발 전 구매한 스마트폰(공기계)과 원래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을 모두 초기화하라고 지시했고 정씨는 시키는대로 했다. 

금감원에 가고 나서야 사실을 깨달았다. 금감원 안내데스크 직원은 김진규라는 검사는 없고 보이스피싱이 의심된다며 은행과 경찰서에 가보라고 했다. 

정씨 명의로 발행됐다며 보여준 사진은 모두 가짜였다. KB국민은행에 가서 대포통장 진의를 물었으나 그런 통장이 발행된 적이 없다고 했다. 물론 태강대부 대출 기록도 허위였다.  

피해는 컸다. 생활비 통장인 신한은행 계좌는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환급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지급정지가 됐다. 3개월 뒤 소액송금만 가능하며 3년간 신규 계좌 개설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경찰서에선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신고를 접수한 관할 경찰서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한 상태다. 정씨는 호텔 및 택시요금, 본인의 가상자산 등 총 500만원 가까운 금전적 피해를 봤음에도 어떠한 조치를 하지 못하고 있다.

검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보낸 허위의  대포통장 입출금 내역. / 제보자 제공
검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보낸 허위의  대포통장 입출금 내역. / 제보자 제공

정씨가 당한 것처럼 보이스피싱 수법은 날로 진화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피해 규모도 급증세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 접수는 2만839건으로 전년 1만8902건 대비 10.2% 늘어났고 피해액은 같은 기간 4472억원에서 8545억원으로 91.1% 급증했다. 올해 6월까지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6421억원에 달해 최대 규모를 또 경신할 전망이다. 

경찰청 피싱범죄수사계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범죄 전략은 피해자를 사회로부터 분리해서 고립시키는 것”이라며 “모텔(호텔)로 갈 때쯤이면 이미 속은 거고 거기서부터 반성문 쓰라고 하는 등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이어  “20대가 스마트폰 사용에는 능숙하지만 사회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가 의외로 많은 편”이라면서 “보이스피싱을 예방하기 위해선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일단 받지 않고 이상하다 싶으면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아니면 지나가는 경찰관, 은행원에게 물어봐야 한다. 제일 간단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금융감독원 금융사기대응단 관계자도 “과거 수법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피해자 한 사람의 ‘골수’까지 빼먹는 셀프감금 보이스피싱이 나온 것 같다”며 “특급 보안 수사 등 평생 들어보지 못한 용어를 얘기하는 사람은 무조건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윤승준 기자
sjyoon@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