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자산 규제가 자리를 잡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업계 전반에 걸쳐 쉬쉬하는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국내 기업이 발행한 가상자산임에도 불구, 국내에 떳떳하게 발을 들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해외 법인을 설립하는 것으로 시작된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의 상당수가 발행은 외국에서 했지만 국내에서도 서비스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오히려 족쇄가 돼 금융당국의 강한 감시와 제재로 ‘역차별’마저 받고 있다.
5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국내 상장 기업이 해외 관계사를 통해 발행 및 운영중인 가상자산은 ▲클레이튼(카카오) ▲보라(카카오게임즈) ▲XPLA(컴투스) ▲한컴위드(아로와나) ▲마브렉스(넷마블) ▲위믹스(위메이드) ▲네오핀(네오위즈) ▲핀시아(네이버) ▲페이코인(다날) 등 총 9종으로, 시가총액 합은 약 2조8000억원에 달한다.
규제 정비된 국가로 떠나는 국산 프로젝트들
이들이 굳이 해외에 재단까지 설립해가며 발행에 나선 것은 아직 정비되지 않은 국내 발행 관련 제도 때문이다. 현행법상 국내 기업의 가상자산 발행을 금지하는 명문화된 법은 없음에도, 금융당국은 이를 유사수신행위로 간주한다.
해외 재단 및 운영사가 위치한 곳은 주로 싱가포르와 스위스, 두바이 등이다. 한국과 달리 이들 국가는 일찍부터 디지털자산을 자본시장에 편입해 의무를 부과하는 등 규제를 만들고 블록체인 관련 산업을 장려하고 있다.
대다수 프로젝트가 비영리법인을 둔 싱가포르는 가상자산을 일찍이 제도권에 편입했다. 싱가포르통화청(Monetary Authority of Singapore, MAS)은 지난 2017년 디지털자산 가이드라인을 제정, 가상자산을 핀테크와 금융 영역에서 각기 규제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동이 블록체인 산업 육성에 힘을 쏟으며 ‘신(新) 크립토 허브’로 거듭나고 있다. 아랍에미레이트(UAE) 두바이는 지난 2022년 가상자산 규제 기관(VARA)을 설치하고 가상자산 규제법(DVAL)으로 법적 토대를 세웠다. 아부다비 역시 지난해 세계 최초로 블록체인 재단과 다오(DAO, 탈중앙화자율조직)를 위한 규제를 만들었다.
이에 싱가포르에서 중동 국가로 아예 거점을 옮기는 기업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초기 시장을 주도한 싱가포르가 지난 2022년 ‘테라-루나’ 폭락 사태 이후 여러 기업의 파산을 겪으며 규제를 다소 강화해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위메이드는 싱가포르 법인 위메이드PTE를 통해 가상자산 위믹스를 발행했으며, 지난 2022년과 2023년 사업 확장을 위해 아부다비와 두바이에 각각 지사를 세우며 중동 진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네이버 관계사 라인 역시 싱가포르 재단을 통해 링크(LINK)를 발행했으나, 핀시아(FNSA) 리브랜딩 이후 지난해 아부다비에 새 재단을 설립했다.
두바이에 위치한 가상자산 기업 관계자는 “싱가포르 재단은 국내 ICO금지 때문에 법인만 설립했을 뿐 사실상 현지에서 업무를 보는 곳들은 많지 않았다”며 “반면 두바이에서는 산업을 적극 장려하고 있어 실제 두바이국제금융센터(DIFC)에 많은 기업들이 입주해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운영중인 서비스도 문닫을 판…국내 복귀는 언감생심
이들 기업이 모국으로 돌아오기란 여의치 않아 보인다. 국내에서는 ICO를 허용하는 법이 제정되기는 커녕, 해외에서 발행된 국산 가상자산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가상자산 및 블록체인과 관련해 국내에서 시행중인 법은 거래소와 지갑 관련사들을 규제하는 특금법 개정안 뿐이다. 오는 7월 시행되는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역시 발행사에 대한 규제는 담고 있지 않다.
국내 유일 가상자산 결제서비스인 페이코인이 당국 그림자 규제 폐해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다날의 페이코인(PCI)은 지난해 4월 서비스를 종료했다. 금융당국이 요구한 실명계좌 획득 요건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페이코인 이용자는 300만명 수준이었고, 업비트와 빗썸, 코인원 등 주요 거래소에서도 거래되는 가상자산이었다.
당국은 페이코인이 자금세탁에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 은행 실명확인 입출금계정을 갖춰야 한다고 했지만, 가상자산 자체를 금기시하는 분위기 속에 페이코인이 이를 획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한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B2C기업들은 서비스 활성화 이전에 매출이 나오지 않아 자본조달도 힘든데 한국에서는 규제까지 명확하지 않다”며 “사업이 망했을 때 투자자 뿐만이 아니라 서비스이용자들까지 피해를 보게 돼 점점 도전하는 기업이 줄고 있다”고 토로했다.
페이코인은 이달 중 금융당국의 요구에 맞춰 가상자산사업자(VASP) 변경신고를 해야 하나 아직까지 재신고를 하지 않았다. 막혀버린 국내 시장 대신 지난해 일본, 두바이에 진출하는 등 해외으로 발길을 돌린 모습이다.
게임 또한 마찬가지다. 게임위원회는 지난해 가상자산을 활용한 P2E(Play to Earn)에 사행성 요소가 있다며 등급 분류를 취소하기도 했다. 실제 위메이드와 컴투스 등 게임사들은 자사가 발행한 위믹스와 XPLA등의 토큰을 해외 유저들을 대상으로 한 게임에서만 유통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 토큰을 정상적으로 발행하고 유통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며 “국내 기업들이 모두 해외로 나간 탓에 싱가포르, 두바이에 회사를 설립해주는 브로커들만 돈을 벌고 기업들이 커져도 이들 국가만 산업이 발전하는 역설적인 상황”이라 비판했다.
원재연 기자 wonjaeyeon@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