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서도 KB국민은행부터 NH농협은행, 우리은행까지 대형 시중은행에서 배임·횡령 등 금융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BNK경남은행에서 발생한 3000억원 규모의 횡령 사고가 은행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듯했지만, 사고를 막을 수는 없었다.
시중은행의 ‘유명무실’ 내부통제 시스템이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하반기 도입되는 ‘책무구조도’를 통해 최고경영자(CEO)에게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관심이 모인다.
2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만 주요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에서 총 11건의 금융사고가 발생했다. 이 중 5건은 100억원대 이상의 대형 금융사고였다.
KB국민은행에서는 5건의 금융사고가 발생했다. 이 가운데 3건이 100억원 이상이었다. 규모는 488억원. 직원이 실적을 위해 부동산 담보가치나 소득을 부풀려 부당대출을 내준 방식의 배임이 발생했다. 세부적으로는 ▲안양 A지점 104억원 ▲대구 B지점 111억3800만원 ▲용인 C지점 272억원 등이다.
NH농협은행은 상반기에 3건의 배임 사고 발생 사실을 공시했다. 규모는 총 174억원이다. 특히 지난 3월 부동산 담보 대출 과정에서 여신 업무 담당 직원이 110억원 규모의 배임을 저지른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달 우리은행에서는 100억원대 횡령 사고가 발생했다. 2년 전 발생한 700억원대 횡령 사고보다 금액은 적지만, 대리급 직원의 횡령을 본점이 6개월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내부통제 소홀에 대한 비판이 유독 거센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은행권 금융사고 규모는 2021년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커지는 실정이다.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이 금감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2020년 100억원 미만이었던 횡령액은 ▲2021년 156억9460만원 ▲2022년 827억5620만원 ▲2023년 642억6070만원 등으로 급증했다.
금감원은 사고가 발생한 은행들에 대해 정기검사 및 현장검사를 진행하고 나섰다. 그러나 금융사고 대책이 사전 예방보다 사후 조치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보다 실효성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CEO 책임 묻는 ‘책무구조도’ 효과 있을까
이달부터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시행됨에 따라 금융지주사와 은행들은 선제적으로 내년 1월까지 책무구조도를 마련, 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달 열린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책무구조도 도입으로 금융회사 임직원들이 내부통제를 자신의 중요업무로 인식하는 등 금융권의 근본적인 행태 변화를 유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금융회사들은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개별 임원에게 내부통제 책임을 물을 수 있게끔 내부통제 대상의 업무 및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재해야 한다. 세부적으로는 ▲준법감시와 위험관리 등 책임자 지정 총괄업무 ▲여신·수신, 투자매매 및 중개, 신탁 등 영업 관련 업무 ▲인사·교육, 보수, 건전성 관리, 업무 위수탁 등이 포함된다.
그동안 ‘금융회사 지배구조법 시행령’에는 CEO 등 임원진을 제재할 근거가 없었다. 이 때문에 앞서 발생한 금융사고 당시 금융사 CEO들이 중징계 처분을 받아도 소송으로 가면 임원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선례가 생겼다. 이번 우리은행 횡령 사건에 대해서도 임종룡 우리금융그룹 회장 등 경영진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울 거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금융권 횡령이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차제에 하급 관리자나 당사자에게만 책임을 묻는 관행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경영자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은행이 전사적으로 내부통제 시스템에 투자할 수 있을 거란 설명이다.
하준경 한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내부통제 시스템을 손보지 않아 생긴 문제라는 것이 확인되면 CEO 등 임원진이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며 “‘경영진은 잘했지만, 직원이 이상하다’고 단순히 여기기보다는 조직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아 기자 kimka@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