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한국이 상호 관세 인하를 위해 약속한 대미 투자를 두고 사실상 협박성 요구를 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이를 무조건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양국 간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면서 협상 장기화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현대자동차그룹이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미 관세 협상은 교착 상태다. 대미 투자 방식을 두고 양국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어서다. 특히 미국의 과도한 요구로 협상 장기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약속한 3500억달러(약 483조원)를 투자 법인에 전액 현금으로 납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거부하면 상호 관세를 다시 25%로 올리겠다는 입장이다. 요구를 수용할 경우 투자처는 미국이 결정하고, 한국 정부는 45일 이내 송금해야 한다. 또한 투자금 회수 전까지는 수익을 절반씩 나누고, 회수 이후에는 90%를 미국이 가져간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사실상 손실은 한국이, 이익은 미국이 떠안는 구조다.
우리 정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단기간에 막대한 달러를 조달하기 어렵고, 지분 투자 방식은 실패 시 투자금을 전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대출이나 보증 방식으로 투자를 진행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관세를 부담하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딘 베이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박사는 “한국과 일본이 미국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어리석다”며 “트럼프의 요구 금액의 20분의 1만 피해 기업과 노동자에게 지원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지적했다. CEPR 분석에 따르면, 한국이 25% 관세를 부담할 경우 수출 감소액은 125억달러(약 17조원) 수준으로, 3500억달러 투자보다 훨씬 적다.
업계에서는 협상 장기화 시 현대차의 피해가 가장 클 것으로 보고 있다. 협상이 결렬돼 25% 관세가 확정되면 현대차가 부담해야 할 연간 관세만 1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본이 16일부터 15% 관세를 적용받으면서 현대차의 가격 경쟁력 약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현재는 가격 동결 기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협상이 길어질 경우 가격 조정이 불가피하다.
가격을 올리면 일본차 대비 경쟁력이 떨어진다. 예컨대 현대차 아반떼(현지명 '엘란트라')의 미국 현지 가격은 2만2125달러(약 3057만원)부터로, 도요타 코롤라(2만2725달러)보다 약 80만원 저렴하다. 그러나 관세만큼 가격을 인상하면 엘란트라는 2만7600달러(약 3812만원)로 오히려 코롤라보다 비싸진다.
여기에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지난 4일(현지시각) LG에너지솔루션과 현대차의 합작법인 ‘HL-GA 배터리’ 공사 현장을 단속해 한국인 근로자 300여 명을 구금·체포한 사건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비자 문제로 인력이 묶이면서 공장 건설이 최대 3개월 지연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공장 건설 지연이 배터리 공급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현대차 측은 이러한 우려에 대해 기존 가격 동결 기조와 미국 투자에 대한 기조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현대차 관계자는 “처음 관세 문제가 발생했을 때부터 현재까지 미국 현지 가격 인상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며 “현재로서는 정부의 후속 협상을 모니터링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한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에서 하이브리드와 전기차를 병행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현지 수요에 대응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HL-GA 배터리 공장 건설 지연과 관련해서도 언급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최근 ICE의 단속으로 공장 건설에 차질이 생긴 것은 맞지만 충분히 해결 가능한 상황”이라며 “건설 지연은 길어야 3개월 수준으로 공장이 완공되면 현지 배터리 공급에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인 구금 사태를 직접 언급한 만큼 인력·장비 문제가 조속히 해결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했다.
허인학 기자
ih.he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