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 자동차 업계는 미국과의 무역 갈등으로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면서 사실상 미국 진출 기회가 차단됐다. 여기에 치열한 가격 경쟁으로 내수 판매까지 흔들리며 위기에 직면했다. 미국 시장 공략이 막히자 중국 업체들은 유럽을 새로운 돌파구로 삼아 ‘우회 전략’에 나섰다.
미국은 중국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중국산 전기차에 기본 관세 외에 100%의 추가 관세를 더해 총 12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했다. 사실상 중국 전기차의 미국 진입을 차단하겠다는 의미다.
중국 내수 시장도 녹록지 않다. 무분별한 가격 인하 경쟁으로 주요 업체들의 실적이 악화됐다. 실제로 중국 자동차 제조사들이 발표한 올해 상반기 실적에 따르면 BYD를 제외한 주요 제조사의 순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줄었다.
지리자동차는 올해 상반기 순이익이 92억위안(약 1조7887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 감소했다. 창청자동차(GWM) 역시 전년 대비 10% 줄어든 63억 위안(약 1조2250억원)을 기록했다. 상하이자동차와 둥펑자동차는 각각 9%, 92% 감소했다. 특히 광저우자동차(GAC)는 25억위안(약 4861억원) 적자를 기록하며 적자 전환했다.
BYD만 상반기 순이익 155억위안(약 3조139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14% 증가했다. 그러나 올 2분기 순이익만 보면 전년 동기 대비 30% 급감했다. 분기별 순이익이 줄어든 것은 3년 만이다.
미국과 내수 시장에서 동시에 위기를 맞은 중국 자동차 업계는 유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미국 관세와 내수 판매 감소를 유럽 우회 전략으로 상쇄하려는 의도다.
그러나 유럽 진출도 순탄치 않다. 유럽연합(EU)은 지난 2024년 10월부터 중국산 전기차가 생태계를 위협한다고 판단해 최대 45.3%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이에 중국 업체들은 전기차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관세가 적용되는 하이브리드(HEV)로 대응하는 전략을 택했다.
실제로 BYD는 전기차 대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판매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데이터포스에 따르면, BYD의 올해 상반기 EU 내 PHEV 판매량은 2만여대로 집계됐다. 이는 2024년 수입된 BYD 전체 하이브리드 차량의 세 배가 넘는 수치다.
현지 생산 전략도 본격화됐다. 중국 전기차 제조사 샤오펑(Xpeng)은 관세를 피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자동차 제조사 마그나슈타이어와 손을 잡았다. 샤오펑은 오스트리아 남부 그라츠에 있는 마그나슈타이어 공장에서 자사 전기차 모델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업계에 따르면 유럽 출시를 앞둔 G6와 G9의 초도 물량은 이미 생산을 마쳤다. 또한 독일 뮌헨에 연구개발 시설을 운영하며, 유럽 전용 전기차 모델을 개발해 마그나 공장에서 생산할 계획이다.
BYD도 현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5월 왕촨푸 BYD 회장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유럽본부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업계는 유럽본부에서 개발한 전용 모델이 헝가리 남부 세게드에 건설 중인 유럽 첫 전기차 생산 공장에서 생산될 것으로 보고 있다.
EU 역시 중국 자동차 업계의 움직임을 인식하고 있지만 뚜렷한 대응책은 내놓지 못한 상태다. 베아트릭스 카임 독일 자동차연구센터 소장은 “중국 자동차 업계가 유럽에서 수익성을 지키기 위해 전략을 전환하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라고 분석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중국 업체들이 안정적으로 유럽 시장에 안착할 것으로 전망한다. 유럽 소비자들의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어서다. 시장조사업체 에스컬런트가 영국·독일·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에서 진행한 조사 결과, 응답자의 47%가 “다음 차로 중국차를 구입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미국차는 44%에 그쳤다.
이는 불과 1년 만에 뒤집힌 결과다. 지난해 같은 조사에서는 중국차를 구입하겠다는 응답이 31%였고, 미국차는 51%였다. 제품 신뢰도도 개선됐다. “중국 제품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지난해 12%에서 올해 19%로 상승한 반면, 미국은 31%에서 24%로 하락했다.
한 업계 전문가는 “중국 자동차 업계의 유럽 우회 전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며 “현지 생산을 통해 유럽 관세를 피하고 유통 비용을 줄일 수 있어 더욱 공격적인 가격 전략을 펼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유럽 전용 모델을 잇따라 내놓을 경우 폭스바겐, BMW 등 현지 브랜드는 물론 현대자동차·기아와도 정면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허인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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