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10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 참석차 15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황 CEO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치맥 회동’을 가졌고 최태원 SK그룹 회장과도 단독으로 만났다. 그는 우리 정부와 주요 대기업에 블랙웰 기반 AI 칩 26만개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엔비디아가 한국 기업 총수와 친근감을 강조하고 협력을 강화한 것을 두고 업계에서는 젠슨 황의 ‘통 큰 선물’이라는 해석도 뒤따른다. 하지만 이는 상황을 단순화한 접근이다. 오히려 엔비디아가 한국 기업을 중요 공급망이자 핵심 파트너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란 해석이 어울린다.

엔비디아는 차세대 AI 칩 ‘루빈’을 2026년 차질 없이 출시해야 한다. 여기에 탑재될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를 제때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필수다. HBM은 AI 가속기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이다. 결국 황 CEO가 세계 최고 수준의 HBM 제조·양산 능력을 갖춘 한국 기업과 협업을 강화하기 위해선 ‘공급사를 제대로 챙긴다’는 제스처가 필요했던 셈이다.

세계 HBM 공급망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등 3개 축으로 요약된다. 이 중 마이크론은 최근 HBM4의 개발·양산 과정에서 엔비디아가 요구한 조건을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금융증권사 제프리스는 마이크론이 HBM4의 대량 공급을 위해 재설계가 필요하며 실제 양산으로 이어지려면 최대 9개월의 추가 시간이 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마이크론의 양산 일정이 늦어질 수 있다는 전망은 곧 엔비디아의 선택지가 좁아진다는 뜻이다. 마이크론이 즉시 전력화되기 어렵다면 눈치를 봐야 할 쪽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아닌 엔비디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4 양산 체제 구축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SK하이닉스는 이미 HBM 시장 점유율 절반 이상을 확보하며 1위 지위를 굳히고 있고, 내년에도 이 주도권을 놓지 않기 위한 행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동안 HBM에서 어려움을 겪은 삼성전자도 최근 HBM3E 납품과 HBM4 샘플 출하 소식을 전하며 경쟁력을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황 CEO의 15년 만의 방한과 적극적인 메시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확보한 기술 경쟁력과 공급망 지위가 끌어낸 결과물이다. 양사 모두 선의의 경쟁을 통해 HBM 공급망에서 ‘슈퍼 을(乙)’로서 시장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길 기대한다.

이광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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