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율주행 시장이 미국 기술의 ‘시험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테슬라와 캐딜락이 한·미 FTA 규정을 활용해 레벨 2 수준의 핸즈프리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을 빠르게 들여오는 사이, 국내 완성차 업체인 현대차·기아는 까다로운 인증 규제에 발목이 잡혀 상용화 일정이 지연되고 있다. 국내 인증 제도가 되레 국산차를 역차별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캐딜락은 지난 20일 플래그십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에스컬레이드 IQ’를 한국 시장에 공식 출시하며, 제너럴모터스(GM)의 레벨 2 핸즈프리 ADAS 시스템 ‘슈퍼크루즈’를 함께 도입했다. 한국은 미국·중국에 이어 슈퍼크루즈가 적용되는 세 번째 국가다.
슈퍼크루즈는 운전자가 전방을 주시하는 조건 아래 스티어링 휠을 잡지 않고도 주행할 수 있는 기술이다. 차량 간 거리 유지, 교통 흐름에 따른 차선 변경 등도 자동으로 수행한다.
채명신 한국GM 디지털비즈니스 총괄 상무는 “슈퍼크루즈 국내 도입을 위해 약 100억원을 투입해 한국 도로 환경에 맞춘 맵데이터·HD(고정밀) 지도·OTA(무선 업데이트) 서버를 구축했고, 라이다(LiDAR) 기반 차선 단위 매핑으로 도로 곡률·버스 전용 차선·공사 구간 등을 정교하게 반영했다”고 말했다.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 역시 지난 23일 ‘감독형 자율주행(FSD·Full Self-Driving)’ 소프트웨어의 한국 배포를 시작했다. 한국은 미국·캐나다·중국 등에 이어 일곱 번째 도입 국가다.
다만 업계에서는 감독형 FSD의 실제 적용 범위가 제한적이라고 본다. 최신 4세대 하드웨어(HW4) 탑재 차량에 우선 적용되는데, 국내 테슬라 판매분 상당수가 중국 생산의 HW3 기반 모델이기 때문이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는 국내 HW4 적용 차량을 약 900대 수준으로 추정한다.
슈퍼크루즈와 감독형 FSD는 미국 자동차기술학회(SAE) 기준 레벨 2 기술이다. 차량이 가속·제동·조향을 수행하지만 운전자가 지속적으로 상황을 모니터링해야 하고 사고 책임 역시 운전자에게 귀속된다.
자율주행 기술에서 국내 완성차 업계는 정체된 모습이다.
현대차·기아는 제네시스 G90과 EV9에 레벨 3 기반의 ‘HDP(Highway Driving Pilot)’를 2023년 적용하겠다고 예고했지만, 적용 시점이 계속 늦춰지고 있다. 회사는 ‘내부 사정’이라는 설명만 내놓은 상태다. 출시 발표 당시 HDP 탑재를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나, 일정이 불투명해지자 관련 이미지와 홍보자료를 뒤늦게 삭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현대차는 2024년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의 진화 버전인 ‘SCC2’를 개발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기아도 타스만·스포티지 공개 당시 운전자가 전방을 주시할 경우 경고음을 최소화하는 ‘HDA+’ 시스템을 소개했다. 그러나 SCC2·HDA+ 모두 국내 적용 일정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가 예고했던 HDP는 레벨 3 기술로, 고속도로·간선도로 등 일정 조건에서 차량이 운전자 대신 조향을 담당한다”며 “레벨 2 대비 책임 주체가 달라지고 보험·인증 요건이 훨씬 까다롭다. 여기에 국내 규제 환경까지 더해지면서 상용화 시점이 늦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한·미 FTA가 이러한 격차를 만든 구조적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FTA에는 미국에서 기술 인증을 마친 미국산 차량에 대해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기술 인증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조항이 있다. 덕분에 미국 생산 캐딜락·테슬라 자율주행 차량과 소프트웨어는 별도의 국내 인증 절차 없이 수입·판매가 가능하다. 미국 생산 차량에만 최신 자율주행 기술이 우선 적용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서 생산해 판매하는 현대차·기아는 같은 기술을 적용하더라도 국내 인증 절차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동일 기술 앞에서 국내 업체만 규제 장벽을 넘게 되는 사실상 ‘역차별’ 구조라는 비판이 나온다.
자율주행 개발사 관계자는 “FTA의 사각지대를 활용한 해외 업체의 기술 선점 현상이 국내 기업의 시장 진입을 늦추고 있다”며 “자율주행 기술 경쟁력이 곧 미래 자동차산업의 핵심인 만큼, 국내 인증 제도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인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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