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컴퓨터 구성에서 ‘메모리’는 CPU가 작업을 위해 필요한 주요 데이터를 저장장치에서 불러와 빠르게 사용할 수 있게 펼쳐 놓는 장소다. 일상에 비유하자면, CPU는 직접 일을 하는 사람이고 메모리 공간은 업무를 위해 필요한 자료를 올려 놓는 ‘책상’ 같은 곳이다. 자료가 필요할 때마다 저장장치에서 바로 불러오는 것은 자료 한 페이지가 필요할 때마다 집 주위의 공공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오는 것과 같다.
메모리의 ‘용량’에 대한 이야기는 PC의 역사 속에서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수십 년 전 빌 게이츠는 ‘메모리는 640KB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이후 수십 년간 640KB는 DOS 환경의 ‘레거시’로 남아 많은 사용자와 개발자들을 힘들게 한 바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최신 스마트폰도 대부분 6~8GB 메모리를 탑재하며, 이조차 충분치 않다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PC에 필요한 메모리 용량은 시대와 사용자의 환경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오늘날은 모든 컴퓨팅 환경이 웹 기반의 인터넷 환경을 공유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공통 기준선이 존재한다. 비교적 큰 화면을 갖추고, 한 화면 안에서 여러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는 PC 환경에서는 이제 실질적인 ‘최소’ 메모리 기준을 ‘16GB’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애플이 최신 맥북 시리즈의 시작점을 여전히 ‘8GB’ 메모리로 선보이며 ‘충분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절대 충분치 않다.
◇ CPU와 프로세서 내장 GPU가 함께 사용하는 메인 메모리
PC에 장착된 메모리는 온전히 CPU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플랫폼 내장 그래픽’으로, 별도의 메모리를 장착하지 않고 시스템의 주 메모리의 일부 영역을 사용한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저가형 PC에서 사용되던 이러한 방법은 이제 PC 시장 전반에서 아주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인텔과 AMD의 프로세서 내장 그래픽은 이미 PC GPU 시장에서 70% 이상의 PC에 사용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플랫폼 수준에서 GPU를 내장하고 시스템의 메인 메모리를 공유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비용’이다. 먼저, GPU가 메인보드나 프로세서 수준에서 통합되기 때문에 시스템 설계에서 GPU와 메모리를 위한 복잡성 증가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큰 매력이다. 또한 제품의 제조 과정에서 복잡성에 따른 변수를 줄일 수 있고, 제품 자체의 크기를 줄이고 디자인의 유연성도 높일 수도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메인 메모리를 공유하는 프로세서 내장 GPU는 성능 측면에서는 메인 메모리의 대역폭을 공유하는 만큼 다소 불리한 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최근의 DDR5급 고속 메모리를 듀얼 채널 구성하면, 엔트리 급 그래픽카드 수준의 대역폭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정도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프로세서 내장 그래픽은 일상적인 PC 사용에서의 성능 요구 수준을 충분히 만족시켜 왔고, 최근에는 ‘게이밍’에서도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춰 가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내장 GPU’ 구성이 PC에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이미 스마트폰과 태블릿 등 모바일 기기의 SoC(시스템온칩)들은 모두 예외없이 ‘내장 GPU’를 사용한다. 이 때, 보통은 메모리에서 GPU가 사용하는 예약 영역은 최소한으로 잡고, GPU가 그 이상의 메모리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소프트웨어 차원에서 그래픽 메모리를 동적 할당하는 식으로 움직인다. 이 방식의 장점은 가용 메모리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소프트웨어의 완성도에 따라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여지도 있다.
◇ 내장 그래픽 사용하는 PC, 좀 더 많은 메모리 용량 갖춰야
지금까지 PC에 필요한 메모리 용량은 꾸준히 늘어 왔다. 이렇게 필요한 메모리의 용량이 꾸준히 늘어 온 데는 운영체제와 프로그램의 변화도 있지만, 이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인터넷’의 변화다. 웹 환경이 더 화려하고 복잡해지면서, 웹 페이지를 불러오는 데 필요한 PC의 자원도 더 늘었다. 여기에 최신 웹 브라우저들이 웹 페이지를 렌더링하는 데 GPU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GPU 메모리 요구 또한 더 늘어나고 있다.
이미 최신 PC 환경에서 ‘8GB’ 메모리는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윈도11은 8GB 메모리에서 부팅 직후 이미 4GB 가량의 메모리를 사용한다. 이는 체감 성능을 위해 남는 메모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정책으로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웹 브라우저의 탭이 10여 개가 넘어가고, 메신저나 오피스 등 다른 프로그램들이 함께 돌아가면 ‘메모리 부족’이라는 현실적 문제에 직면한다. 이런 때, 상황에 따라서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스템이 느려져 하고 있던 작업을 채 저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나타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웹 브라우저에서 ‘메모리 부족’ 경고가 뜨는 시점에 작업 관리자의 메모리 사용은 100%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프로세서 내장 GPU 등 작업 관리자에 ‘보이지 않는’ 메모리 사용이 영향을 끼친 경우다. 인텔의 경우 내장 GPU의 메모리 사용 정책은 작게는 128MB 이하의 최소한의 공간만을 예약하고,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할당해 사용하며, 공유 GPU 메모리는 물리 메모리의 절반 혹은 특정 용량까지 할당 가능해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통합 메모리’ 구성에서 메모리 용량은 시스템의 기능 구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 출시된 애플의 ‘M3’ 칩 기반 맥북 프로 모델의 경우, 최소 사양인 8GB 모델에서는 메모리 부족으로 새로운 GPU의 특징인 레이 트레이싱 등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고, 작업 성능에서도 불이익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경우는 아주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애플의 말처럼 8GB 용량은 이제 충분하지도 않다. 메모리 전송 속도가 빠르다고 부족한 용량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현재의 ‘최적’은 16~32GB, 확장 불가능한 8GB 구성은 피해야
현재 PC 환경에서 비용 대비 체감이 가장 만족스러운 용량대는 16~32GB 정도다. 16GB 정도면 내장 그래픽을 사용한다 해도 일상적인 웹과 사무 환경에서는 거의 부족함이 없고, 32GB 정도면 극히 일부의 전문 작업을 제외하면 언제나 여유로운 용량이다. 개인적으로는 대략 10년 가까이 64GB 메모리를 사용했지만, 다수의 가상 머신 활용 이외에는 실제 일상과 업무 환경에서 32GB 이상 메모리를 사용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흔히 메모리는 ‘거거익선’, 크면 클수록 좋다고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메모리 용량 또한 어느 정도 CPU 성능과의 ‘밸런스’가 필요하다. 메모리가 많아도 CPU 성능이 충분치 못하면, 메모리를 다 사용하기 전에 CPU 성능에서 한계를 마주하기도 한다.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할 용량의 메모리에 비용을 지출할 필요는 없는 만큼, 전문 업무용 등 용도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기본 용량은 16GB 정도로 잡고, 조금 여유를 부린다 해도 32GB 정도가 적절할 것이다.
한편, 최근 많은 노트북들이 메인보드에 직접 장착되는 LPDDR 메모리를 사용하는데, 이런 구성은 사용자의 임의 확장이 불가능하다. 물론 LPDDR이 아니더라도 설계에 따라서는 메인보드에 직접 장착되거나, 메모리 소켓이 한 개만 있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많은 제조사들이 일부 모델을 제외하면, 이러한 기술적 정보를 정확히 제공하지 않는다.
이런 복잡한 경우의 수를 피하려면, ‘구매 후 확장’ 옵션을 생각하지 말고 처음부터 필요한 용량의 메모리가 장착된 모델을 구입하는 게 안전하다. 이미 애플의 맥북 제품군은 제법 오래 전부터 사용자가 메모리를 확장할 수 없었던 만큼, 고가의 최상위 모델을 구매하는 게 최선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온 바 있다. 물론 ‘가격’이 문제지만, 대안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을 부분이다.
현재 시점에서 노트북 구매에 있어 가장 피해야 할 메모리 구성은 확장 불가능한 ‘8GB’ 구성이다. 8GB 용량은 당장은 괜찮은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곧 심한 메모리 부족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은 사실 운영체제와도 큰 상관이 없다. 오늘날 가장 널리 사용되는 크롬, 엣지와 같은 ‘크로미엄’ 기반 웹 브라우저는 이미 모든 플랫폼에서 활용되며, 같은 페이지를 로딩하면 사용하는 메모리 용량에는 큰 차이를 기대하기 어렵다. 크로스 플랫폼 기반 앱들도 마찬가지다. 애플의 ‘우리의 8GB는 다른 노트북의 16GB와 동급’이라는 말이 허무한 메아리로 들릴 수밖에 없을 이유다.
권용만 기자 yongman.kwon@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