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통화정책에 있어 ‘천천히 서두름(Festina Lente)’의 원칙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섣부른 통화정책 전환이 더 큰 정책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꼬집었다. 경제 예측의 정확성을 높이고 정교한 정책을 운용해야 하겠다는 다짐도 확인했다.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테스트와 디지털 강화 등을 추진하는가 하면 한국은행이 구조개혁과 관련한 목소리를 높여 우리나라 최고의 싱크탱크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3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국은행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3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국은행

이창용 한은 총재는 12일 한은 창립 제74주년 기념식에서 “물가가 제대로 안정되지 않으면 실질소득 감소, 높은 생활물가 등으로 취약계층의 어려움은 가중된다”면서 “섣부른 완화기조로 다시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그때 감수해야 할 정책비용은 훨씬 더 크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통화정책 여건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다고 진단하면서 ‘천천히 서두름(Festina Lente)’의 원칙을 되새겨 볼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수출과 내수의 회복세 차이가 완연하고 내수 부문별로도 체감 온도가 상이하다”면서 “주요국 통화정책의 불확실성에 따른 환율 변동성 확대 등으로 물가의 상방 위험이 커진 데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존재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인내심을 갖고 현재의 통화긴축 기조를 충분히 유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너무 늦게 정책 기조를 전환하면 내수 회복세 약화와 연체율 상승세 지속 등으로 시장불안을 초래할 수 있고 반대로 일찍 정책을 전환하면 환율 변동성과 가계부채 증가세 확대 가능성이 있다는 게 이 총재의 설명이다.

이 총재는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마지막 구간에 접어든 지금, 세심하고 균형 있는 판단이 필요하다”면서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정책 결정에 있서 가장 중요하게 내세운 ‘천천히 서두름’의 원칙을 되새겨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화정책 외에도 한은이 추진해야 할 과제를 차례로 꼽았다. 오는 8월부터 반기에서 분기 단위로 세분화된 경제전망을 통해 분석 능력을 제고하고 시장과의 소통을 늘리고 금통위원의 통화정책 전망 발표를 개선한다. 실거래 기반의 무위험지표금리를 준거로 하는 금융상품 거래를 장려해 파생상품시장의 활성화에도 힘을 보탠다. 

특히 CBDC 등 새로운 미래 금융인프라 시범 구축에 적극 참여하고 국가 간 지급결제 시스템의 새로운 표준을 설정하는 작업에 처음부터 함께 해 초기 설계자로 자기 매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총재는 구조개혁을 위한 한은의 선도적 역할도 강조했다. 그는 “저출생·고령화, 지역불균형과 수도권 집중, 연금 고갈과 노인 빈곤, 교육 문제, 소득·자산불평등, 노동시장 이중구조 등의 문제 앞에서 우리의 연구 영역을 통화정책 테두리 안에만 묶어 둘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은이 우리나라 최고의 싱크탱크가 돼야 한다”며 “국가경제의 발전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다는 책임감으로 구조개혁 과제에 대해 제언하는 역할을 계속해 나가야 하겠다”고 했다.

한은 구성원들을 향해서는 “때로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똑똑한 이단아’가 돼 한은의 혁신을 이끌어주길 바란다”며 “‘한은사(寺)’에서 벗어나 ‘시끄러운 한은’으로 거듭나도록 하자는 것이 제가 취임 때부터 밝혔던 포부인 만큼 이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과 논란은 실력으로 이겨내자”고 말했다.

한재희 기자 onej@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