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휴대폰 유통점에 의무화된 '신분증 스캐너' 시스템이 불법 프로그램에 의해 손쉽게 뚫리고 있다. 통신 당국과 통신사들이 수박 겉핥기식 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소비자만 대포폰 개통·보이스피싱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다. 

시민들이 3월 12일 서울의 한 휴대폰 매장 앞을 지나가고 있다. / 뉴스1
시민들이 3월 12일 서울의 한 휴대폰 매장 앞을 지나가고 있다. / 뉴스1

19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16년 "개인정보 유출을 막고 보안을 강화하겠다"며 신분증 스캐너 도입을 의무화했다. 이에 유통점은 현장에서 휴대폰 가입을 원하는 고객의 신분증 원본을 받아 스캔한 뒤 전산 등록 절차를 밟아야 한다. 알뜰폰 업계의 경우 스캐너를 설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2022년 9월 국무조정실 주관 '보이스피싱 대응 태스크포스' 지침에 따라 지난해 의무화됐다.

하지만 신분증 스캐너는 이전부터 문제로 지적된 불법 프로그램의 존재로 인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다. 불법 프로그램이 등장해 통신사들이 보안 업데이트를 진행하면 며칠 내로 이를 뚫을 수 있는 새 불법 프로그램이 나와 고객을 위협한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실물 신분증을 인쇄한 '신분증 이미지' 만으로 스캐너 검증을 뚫고 개통이 가능한 불법 프로그램이 여전히 시장에 쓰인다. 통신업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며 "심지어 일부 영업사원은 셀피 포토프린터를 휴대해 직접 고객의 인쇄를 도와준다"고 밝혔다. 

보안업계 관계자는 "시중에 보급된 스캐너 종류가 여러 개인데 신분증 이미지만으로 개통이 가능한 스캐너가 존재한다"고 귀띔했다.

통신사들도 불법 프로그램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지만 통신사와 계약을 맺은 대리점이 아니라 비계약 관계인 일부 판매점의 일탈이라고 규정한다. 한 통신사 관계자는 "통신사들과 계약을 맺은 대리점이 아닌 일부 판매점에서 보조금 등을 많이 받기 위해 일탈을 벌인다"고 말했다.

신분증 스캐너 보급을 맡고 있는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KAIT) 관계자는 "일부 유통점에서 문제가 있어 전국 유통점을 대상으로 불법 프로그램 사용 여부 등을 2월 말까지 점검했다"며 "앞으로 시스템 유효성 강화 등을 통해 대응해나갈 방침이다"고 말했다. 

과기정통부 한 관계자는 "해당 내용이 사실이라면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제대로 알아보겠다"며 사실상 해당 내용을 인지조차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통신 당국과 통신사들이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가운데 업계는 "불법 프로그램은 실적 증대 목적뿐만 아니라 대포폰 개통에도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일부 고객의 신분증 정보가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유통점 사이에 떠돌고 있다는 후문도 들린다.

2019년 이후 매년 감소 추세였던 보이스피싱 피해 건수는 지난해부터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8545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고 피해건수는 2만839건으로 2023년(1만8902건)에 비해 10%나 늘었다. 

보이스피싱 피해가 늘자 과기정통부는 3월 6일 "대포폰을 차단하기 위해 휴대폰 개통 때 본인확인을 위한 안면인식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과기정통부는 통신업계 관계자들과 최근 세미나를 열고 안면인식 시스템 도입 관련해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마저도 통신사들이 비용 문제 등을 들어 난색을 표하면서 진통이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통신사들은 도입 결정 이전부터 계속 반대의사 밝혀왔다. 시스템 구축비 등 투자비가 늘어나고 대리점·판매점을 방문해 도입 여부를 확인하는 등 관리포인트가 늘어나는 이슈 때문일 것이다"고 말했다.

반면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통신사들이 반대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며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신사들은 "과기정통부와 협의해야 할 사안이다"며 "구체적으로 말할 단계가 아니다"고 밝혔다.

김광연 기자
fun3503@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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