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이 차세대 성장축으로 내세운 ‘ABC(인공지능·바이오·클린테크)’ 전략 중 바이오 영역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올해 신년사를 통해 AI와 바이오 기술로 고객의 삶을 바꾸겠다고 밝힌 지 7개월여 만에 미국 바이오기업에 투자를 확대하는 등 바이오 사업 고도화를 본격화하는 분위기다.

LG본사 전경. / LG
LG본사 전경. / LG

LG는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 본사를 둔 메신저리보핵산(mRNA) 치료제 개발사 ‘스트랜드 테라퓨틱스’의 시리즈B 투자 라운드에 참여했다. 2017년 MIT 출신 연구진이 창업한 스트랜드는 체내 세포를 프로그래밍해 특정 항원을 원하는 시점에 생산하게 하는 독자 기술을 바탕으로 암과 자가면역질환, 희귀질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이번 투자는 LG의 실리콘밸리 법인형 벤처캐피털인 LG테크놀로지벤처스가 집행했다. 이번 투자를 통해 LG의 바이오 분야 누적 투자액은 5000만달러(약 695억원)를 넘어섰다. 지난해 말 3500만달러 수준이던 투자액이 올해 들어서만 약 1500만달러 늘었다.

LG는 스트랜드 외에도 ▲희귀 비만 치료제 개발사 ‘아드박 테라퓨틱스’ ▲헬스케어 데이터 분석 기업 ‘에티온’ ▲디지털 청진기 기반 조기진단 기술 보유사 ‘에코 헬스’ ▲세포 치료제 개발사 ‘아셀렉스’ 등에 투자하며 글로벌 바이오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있다.

LG가 바이오 분야에서 차별화를 두고 있는 부분은 바이오 테크와 AI의 융합이다. 앞서 LG AI연구원은 1분 만에 암을 진단할 수 있는 AI 모델 ‘엑사원 패스(EXAONE Path) 2.0’을 공개한 바 있다. 유전자 변이, 발현 양상, 조직 미세구조 등 방대한 병리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분석해 암 여부를 판별하고 기존 병리판독 대비 정확도와 속도를 모두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특히 영상·유전자·임상정보를 통합 처리하는 멀티모달 분석이 가능해 대량 병리 샘플을 신속하게 선별하고 치료 방침 수립에 필요한 분자단위 정보까지 제공한다.

LG는 이 기술을 미국 밴더빌트대 메디컬센터와의 공동 연구에 적용해 의료 AI 플랫폼을 개발 중이며 세계적인 유전체 연구기관 잭슨랩과 알츠하이머 치료제 후보 물질 발굴, 서울대 백민경 교수팀과의 단백질 구조 예측 AI 개발에도 활용하고 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ABC(인공지능·바이오·클린테크)’ 전략을 통해 그룹을 이끌 차세대 성장 동력을 마련하고 있다. / LG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ABC(인공지능·바이오·클린테크)’ 전략을 통해 그룹을 이끌 차세대 성장 동력을 마련하고 있다. / LG

특히 LG그룹 내에서 실질적 신약 개발과 상용화를 담당하는 축은 LG화학이다. LG화학은 전체 22개 신약 파이프라인 가운데 41%를 항암 분야에 집중하고 있으며 미국 손자회사 ‘아베오파마슈티컬(아베오)’을 전진기지로 삼아 글로벌 항암제 시장 공략에 나섰다.

LG화학은 지난 2024년 1월 약 7072억원에 아베오를 인수했다. 이는 그룹 역사상 최대 규모 바이오 투자로, 신장암 치료제 ‘포티브다’와 두경부암 치료제 ‘파이클라투주맙’ 등 상업화 단계 제품을 포함한 탄탄한 항암제 라인을 확보했다.

LG화학은 지난 5월 말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임상종양학회(ASCO 2025)에서 포티브다와 파이클라투주맙의 최신 임상 데이터를 공개했다. 포티브다는 옵디보·여보이 병용 또는 VEGF TKI+면역항암제 치료 실패 환자를 대상으로 한 2차 치료에서 단독요법과 병용요법 모두 무진행생존기간(PFS) 9개월대의 유사한 효능을 보였고, 객관적 반응률(ORR)은 단독요법이 오히려 더 높았다.

파이클라투주맙은 HPV 음성 재발성·전이성 두경부 편평세포암 환자를 대상으로 세툭시맙 병용 효과를 검증하는 3상 시험이 진행 중이며, FDA로부터 패스트트랙 지정을 받았다. 아베오는 글로벌 임상기관을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늘려 110곳으로 확대하는 등 환자 모집과 데이터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LG화학은 이 밖에도 악액질 타깃 항체 치료제 ‘AV-380’의 임상 1b상을 진행하고, 자체 개발한 면역항암제 후보물질 ‘LB-LR1109’의 미국 임상 1상을 연내 개시할 계획이다. LB-LR1109는 면역관문 분자인 LILRB1 억제를 통해 면역세포의 전반적인 공격 능력을 활성화하는 기전을 갖는다.

회사는 올해 1분기 연구개발비 2800억원 중 1140억원을 생명과학 부문에 투입하기도 했다. 매출 비중이 2.4%에 불과한 부문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것은 항암제를 포함한 생명과학을 그룹의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구광모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2024년 LG화학 생명과학 부문 매출은 전년 대비 30% 늘어난 1조1834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업계는 LG의 바이오 전략이 단순한 재무적 투자에 그치지 않고 AI 기반 플랫폼 개발과 글로벌 임상 확대를 병행하는 ‘투트랙’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한다.

업계 관계자는 “LG가 글로벌 유망 바이오텍과 손잡고 AI 기술을 접목한 신약 개발을 추진하는 것은 시장 선점 경쟁에서 속도 우위를 점하려는 포석”이라며 “특히 AI로 신약 후보물질 발굴·선별·검증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고 임상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은 대형 제약사들이 주목하는 차세대 개발 모델로 머지않아 LG가 글로벌 항암제 시장에서 의미 있는 점유율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동명 기자

simal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