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강국 대한민국에서 배터리 하나가 최소 100억원에 달하는 손실을 만들어냈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센터 화재는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49일간의 복구 작업이 끝난 지금,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웠느냐다.

9월 26일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센터 내 무정전전원장치(UPS)에서 시작된 화재로 정부의 696개 시스템이 동시에 다운됐다. 1000명의 전문 인력을 투입하고도 초반 한 달간 복구율이 50%를 넘지 못했다. 11월 14일 마지막 시스템인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대표 홈페이지'가 복구되면서 긴 악몽이 끝났지만, 이제는 현실을 직시할 시점이다.

한 개의 배터리실 화재가 국가 전체 정보시스템을 마비시켰다.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를 자랑하던 우리가 정작 가장 기본적인 안전 장치에서 무너졌다. 화려한 디지털 서비스 뒤에 숨어 있던 허술한 기반 시설이 고스란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정부는 '전산실 총점검령'을 내렸다. 주요 공공기관들이 서둘러 점검표를 작성해 제출했다. 하지만 현장을 아는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다. "체크리스트 몇 장으로 근본 문제가 해결되겠느냐"는 것이다. 18일 정부와 IT서비스 업계 등에 의하면 전국 공공기관과 지자체 전산실 대부분이 10년 넘은 노후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리튬이온 배터리 화재를 막기 위한 고도화된 관리 시스템, 전용 소화 설비, 내화 격벽 분리 같은 최신 안전 기준은 꿈도 못 꾼다. 

여기서 정부의 근본적 모순이 드러난다. 안전 기준은 계속 높이면서 예산은 각 기관이 알아서 마련하라고 떠넘기는 구조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점검해도 실질적 개선은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점검했으니까 안전하다'는 착각만 심어줄 뿐이다.

재해복구(DR) 시스템 부실도 마찬가지 패턴이다. 평소에는 예산 절약을 이유로 투자를 미뤄두고, 사고가 터지면 뒤늦게 예산을 쏟아 붓는다. 각 부처에 흩어진 재해복구(DR) 예산을 행정안전부로 집중한다지만, 근본적으로 예산 규모 자체가 부족하다. 대구센터로의 이전을 위해 261억원을 추가 편성했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이런 재앙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우선순위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클라우드 같은 최신 기술 도입에는 예산을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이 모든 것을 떠받치는 기반 인프라의 안전성은 뒷전이었다. 사전 예방 투자 대신 사후 수습에 몇 배 더 비용을 쓰는 게 과연 합리적인가.

근본부터 바꿔야 한다. 디지털 인프라 안전을 국가 핵심 과제로 격상시키고, 개별 기관의 예산 한계를 탓하지 말고 국가가 직접 나서야 한다. 노후 전산실 전면 현대화, DR 체계 고도화, 전문 인력 확충을 패키지로 추진하는 종합 대책이 필요하다.

배터리 하나가 나라 운영을 멈추는 현실에서 디지털 강국을 논할 수 있을까. 국정자원 화재는 우리의 허약한 민낯을 보여준 값비싼 거울이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기초부터 다시 다져야 할 때다.

홍주연 기자
jyhong@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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