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비트코인은 단순한 기술 투자가 아니다. 화폐 안전자산의 디지털 버전이 되어가고 있다.”
올해 초 마이클 세일러 마이크로스트래티지 CEO의 발언은 비트코인을 ‘디지털 금’으로 치켜세우던 서사의 정점이었다. 실제로 그는 2020년부터 5년간 42만개가 넘는 비트코인을 매입하며 기업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암호화폐 투자자로 떠올랐다.
최근에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까지 나서 “비트코인을 전략적 비축 자산으로 삼겠다”며 ‘디지털 포트 녹스(Digital Fort Knox)’라 불렀다. 이는 미국 켄터키주에 위치한 세계 최대 금 보관소 ‘포트 녹스(Fort Knox)’에 비유한 말로, 비트코인을 금처럼 국가 차원에서 안전하게 비축하겠다는 상징적 선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같은 호언이 비트코인을 진짜 안전자산으로 만들어주진 못했다. 트럼프의 발언 직후 비트코인은 오히려 25% 가까이 급락했다. 시장은 안정되기는커녕 투기적 기대감에 들끓었고, 곧 실망 매물로 전환됐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비트코인이 정치적 내러티브에 휘둘리는 테마성 자산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특히 트럼프의 개입 이후 비트코인이 ‘보호받는 자산’이 아닌 ‘정치 이슈에 반응하는 자산’이 되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최근 온스당 3200달러를 돌파한 금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하다. 전통적인 안전자산은 위기 속에서 조용히 자금을 끌어모으며 제 역할을 했지만, 비트코인은 '정책 기대→급등→급락'의 불안정한 사이클만 반복했다.
데이터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SVB)과 시그니처뱅크가 잇따라 파산하며 미국 내 중소은행발 금융위기가 촉발됐다. 당시 주식시장은 급락했지만, 비트코인은 반대로 20% 넘게 급등했다. 특히 금과 비트코인의 가격 흐름이 거의 비슷하게 움직이며, 시장에선 ‘디지털 금’ 서사가 다시 힘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흐름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해 이후 비트코인은 기술주와 다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나스닥 지수가 오르내릴 때마다 비트코인도 비슷하게 반응했고, 투자자들 사이에선 회의론이 고개를 들었다.
스티펠의 수석 전략가 배리 배니스터는 “비트코인은 고레버리지 테크 ETF와 동조하는 투기 자산”이라며 ‘안전자산’이라는 프레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꼬집기도 했다.
물론 비트코인은 전통 자산과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국경 없이 이동할 수 있고, 검열을 피하며, 정부 통제를 받지 않는다. 무역전쟁이나 자본통제가 강화될수록 그 가치가 부각될 수 있다. 그러나 ‘버티는 자산’이라는 안전자산의 본질적 속성은 아직 완전히 증명되지 않았다. 제도권 수용이 오히려 투기 수요를 자극한다면, 신뢰 대신 변동성만 남게 된다.
비트코인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걸까. 금을 대체할 것인가, 아니면 금처럼 포장된 정치 테마주인가. ‘디지털 금’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산이 되기 위해선, 가격이 아니라 신뢰를 다시 세워야 한다. 그 신뢰는 정부가 아닌 시장이 만들어야 한다.
원재연 기자
wonjaeyeon@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