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가 미국과 관세 협상을 앞두고 '1000억달러(1370조원)+α' 수준의 현지 투자 계획을 조율 중이다. 재계도 관세 문제를 두고 정부와 ‘원팀’ 행보에 공감을 표한다. 하지만 이미 대규모 현지 투자를 단행한 상황에 추가 투자까지 나서는 것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상법개정안이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다.
25일 예정된 한미 2+2 고위급 통상협의는 미국 측 요청으로 연기됐다. 이와 별개로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 측에 4000억달러(약 548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가 기업들과 협의해 마련한 1000억달러 수준의 제안 금액을 크게 상회하는 수치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에 이어 24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연이어 만찬 회동을 갖고 대미 투자 방안과 관련한 의견을 나눴다. 하지만 기업들은 이미 미국 내 진행 중이거나 집행 예정인 투자 건 외에 추가 투자 여력은 제한적이라는 입장이다.
삼성전자는 370억달러, SK하이닉스는 38억7000만달러를 미국 반도체 생산 거점에 투자를 집행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국내 배터리 3사도 조지아주, 오하이오주, 인디애나주 등에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재계가 이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는 7월 초 상법 개정에 이어 2차 상법 개정이 추진되는 가운데 이사회의 책임과 법적 리스크가 커진 탓도 있다. 일부 기업은 이미 대규모 대미 투자를 단행한 상황에서 정부 요청에 따른 신규 투자 참여가 경영상 명분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이사회 반발과 법적 소송에 직면할 수 있다고 본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재 미국 투자 계획 중 일부는 아직 집행되지 않았고, 이를 정부가 협상 카드로 활용하는 것은 가능해보인다”면서도 “플러스 알파(+α)로 추가 투자를 요청받을 경우 이사회에서 명분을 확보해야 하며 상법 개정 이후에는 이같은 결정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기업이 관세 협상에 협조하고 싶어도 재무 건전성에 부담이 있는 상태에서 정당한 사업성과 투자 명분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사회의 문턱을 넘기 어렵다는 호소다.
최근 여당이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에게로 확대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에 기업이 손실 우려가 있는 투자를 단행할 경우, 이사 개인이 민사책임을 질 가능성이 커진다. 특히 이사회 의사결정 시 만장일치를 확보하지 못하면 내부 반대 의견이 외부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은 투자 결정에 앞서 법적 리스크부터 따질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또 다른 재계 한 관계자는 “관세 협상을 위한 투자 방안이 일정 수준의 설득력을 갖더라도 이사회의 만장일치를 이끌어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라며 “최근 잇따른 상법 개정 움직임이 오히려 정부의 산업 정책 추진에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경제계는 기업의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과도한 투자 압박보다는 이사회 결정 구조와 법제도 환경에 대한 이해를 선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낸다.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8단체는 24일 공동 성명을 내고 “추가적인 상법 개정은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위협에 우리 기업들을 무방비로 노출할 수 있다”며 “기업의 펀더멘털(기초체력) 악화와 가치 하락을 초래해 결국 주주가치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광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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