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4대 금융그룹 회장들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Circle)과 잇달아 만남을 갖는다. 신한·하나 회장이 직접 서클 경영진을 마주하고, 우리·KB도 최고위급 인사가 논의에 나선다. 지금까지 ‘관망’ 수준이던 금융권의 스테이블코인 사업이 슬슬 속도를 내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진옥동 신한금융그룹 회장과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이 22일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과 만난다./각 사 제공
진옥동 신한금융그룹 회장과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이 22일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과 만난다./각 사 제공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과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은 이날 히스 타버트 서클 사장과 각각 면담할 예정이다. 우리은행에서는 정진완 행장이 KB금융에서는 디지털 부문 총괄 이창권 부문장도 미팅을 준비 중이다. 하나금융의 경우 오는 26일에는 지주 관계자와 테더사 관계자와의 만남도 계획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클(USDC)은 테더(USDT)와 함께 글로벌 스테이블코인을 양분하는 절대강자다. 양사가 합쳐 현재 2000억달러의 시가총액을 기록 중으로 시장점유율은 테더가 62%, 서클이 25% 가량으로 테더가 서클보다 높지만, 서클은 뉴욕증시에도 이름을 올린 상장사다.  

국내에서 스테이블코인은 아직 제도적 미비로 이렇다 할 사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금융지주 회장단을 비롯, 고위 인사가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를 직접 만난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된 것 아니냐는 진단이 나온다.

국내 금융사들은 그간 신중모드로 스터디 차원의 검토를 진행해왔다. 사업이 본격화 했을 때 시장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원화 스테이블코인 상표를 선점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국민은행은 그룹 자상자산 대응 협의체 내 스테이블코인 분과를 상설 조직으로 전환, 시나리오별 검토를 본격화했다. 하나은행과 우리은행 등은 디지털 관련 부서에서 스테이블 코인 관련 사업을 검토하고 있다. 

정진완 우리은행장은 지난달 25일  경영전략회에서 “디지털 환경 변화가 올해 하반기 주요 환경 변화 중 하나”라며  “스테이블코인 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한국은행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외화유출·규제 회피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며 신중한 접근을 주문하고 나선 상황이다. 은행권 중심의 안전하고 점진적인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주요 금융지주들도 동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테이블코인 첫 타자 누구?… 은행권 키 잡을 가능성 높아

국내 스테이블코인 사업은 은행권이 가장 유리한 구도에 있는 것으로 점쳐진다. 원화와 스테이블코인을 연결하는 환전·송금 창구 역할이 가장 현실적이어서다. 은행이 직접 정산을 담당하면 지금보다 훨씬 빠르고 저렴하게 해외 송금이 가능해진다.

준비금 관리 부분에서도 은행에 강점이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가치를 유지하려면 동일한 규모의 달러나 안전자산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이를 은행이 수탁하고 운용한다면 발행사 단독일 때보다 신뢰성이 높아진다. 소비자 보호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모델도 거론된다. 예금을 토큰화해 24시간 결제·정산에 활용하는 이른바 ‘예금토큰’이다. 일본의 디지털 엔화 실험처럼 은행이 발행 주체가 되면 규제 안에서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기에 다국적 기업을 대상으로 해외 자금 이동이나 무역 대금을 스테이블코인 기반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스테이블코인 USDC를 발행하는 서클 그룹의 최고경영자(CEO) 제레미 앨리어와 공동 창립자 션 네빌이 지난 5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NYSE)에서 열린 회사 기업공개(IPO)에 참석했다. / 조선DB
스테이블코인 USDC를 발행하는 서클 그룹의 최고경영자(CEO) 제레미 앨리어와 공동 창립자 션 네빌이 지난 5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NYSE)에서 열린 회사 기업공개(IPO)에 참석했다. / 조선DB

해외에선 이미 발빠르게 움직이는 중이다. 미국은 지난 7월 ‘GENIUS법(지니어스법)’을 제정해 연방 차원의 스테이블코인 감독 체계를 마련했다. 은행뿐 아니라 특정 신탁기관도 발행이 가능하며, 상환준비금 투명성 의무가 법제화됐다. 

유럽연합(EU) 역시 미카(MiCA) 시행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전자화폐토큰(EMT)으로 규율하고 있다. 서클은 프랑스에서 전자화폐기관(EMI) 인가를 받아 USDC·EURC를 미카 규정에 맞춰 발행하고 있다.

프랑스 금융그룹 소시에테제네랄의 디지털 자회사 SG포지(SG Forge)는 지난해 유로화 기반 스테이블코인(EURCV)에 이어 올해 달러 연동 ‘USDCV’를 발행했다. 

일본은 2023년 개정된 자금결제법에 따라 은행·신탁·자금이체업자만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제도권 기반의 ‘일본형’ 스테이블코인 실험에 속도가 붙었다. 일본의 핀테크 기업인 JPYC는 회사의 이름을 딴 엔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예정이다. 일본의 3대 메가뱅크들은 ‘프로그맷(Progmat Coin)’ 플랫폼을 통해 스테이블코인 발행 기반을 구축했다. 

이번 써클과의 만남 이후 금융권이 스테이블 코인 발행을 본격화한다면 가장 먼저 부상할 과제는 ‘거버넌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발행사 단독이 아닌, 은행·감독당국·외부 감사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 거버넌스 체계를 마련해 공동 대응한다는 방식이다. 단독으로 발행하거나 운영하기에는 규제 리스크와 신뢰 확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서클은 발행을 담당하지만 준비금은 BNY멜론 같은 글로벌 은행이 보관·관리하고, 블랙록 등은 준비자산 펀드를 운용해 수익을 창출한다. 여기에 외부 회계사가 매월 검증하는 식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번 만남에서 구체적인 사업의 내용이 오가기 보다는 포괄적이면서도 러프한 이야기들이 오가지 않겠나”며 “해당 사업과 관련해서 한 금융사만 독점적 배타권을 가지거나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스테이블 코인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권 역시 기조에 맞춰 가는 것”이라며 “주요국에서 이미 시작된 흐름을 역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 시장에 가장 맞는 방법을 찾는 중”이라고 했다. 

한재희 기자
onej@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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