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필요성에는 공감한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하면서도 방식과 시기를 두고는 한층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안전한 도입’이 필요하단 설명이지만 그 기저에는 통화정책 주도권과 발권력 위상 하락에 대한 우려가 자리한다는 분석이다.
1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앞으로 화폐에 프로그램 기능을 넣기 위해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꼭 필요하다”면서도 “은행부터 도입한 뒤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발행 주체에 대해 “돈세탁 방지를 위한 KYC(고객신원확인) 시스템을 갖춘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만 허용해야 한다”면서도 “비은행 대기업에 허용하면 기존 은행 중심의 금융산업 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고 신중론을 거듭 강조했다.
자본 규제와 통화정책 영향에 대한 우려도 드러냈다. 이 총재는 “자본자유화를 허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면, 자금이 해외 거래소에 흘러가 사실상 원화 예금이 해외에 쌓이는 것과 같다”며 “자본 규제를 완전히 피할 수 있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은행을 통한 지급준비율 조절 체계와 달리, 비은행 발행사에 국채 매각을 요구해도 신속히 실행되지 못하면 통화정책 효과가 약화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과의 경쟁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그는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의 99%가 달러 기반인데, 원화를 발행한다고 달러 수요가 줄지는 않는다”며 “국내 가상자산 시장 상황을 고려해 도입 시기를 점진적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설명이다.
발행사가 (담보로) 국채를 사면 지급된 돈이 예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유동성이 줄지 않고, 안전자산을 담보로 보유하면 코인 런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견에도 이 총재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코인런 위험 역시 담보 국채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며 “발행자의 신뢰가 흔들리면 보유자가 귀찮음을 감수하며 계속 들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한국은행은 ▲외환규제 우회 ▲금산분리 완화 논란 ▲통화정책 유효성 제약 ▲코인런 리스크 전이 등을 핵심 위험 요인으로 꼽는다. 비은행에 발행을 허용하는 것은 사실상 ‘지급결제전문 은행(Narrow Bank)’을 허용하는 것과 같아 금산분리 원칙 완화 여부까지 논란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이러한 우려는 단순한 안전성 문제를 넘어 발권력 위상 자체와도 직결된다. 민간 금융사가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이 널리 사용되면 ‘법화 발행 주체’로서 한국은행의 지휘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김용진 서강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안전한 방식으로 도입하자는 것에 이견은 없겠지만 굳이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면서 “스테이블코인 도입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서비스를 붙일 수 있고 이를 통해 금융산업을 어떻게 발전시켜갈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비은행권에 제한하는 것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효과가 제한되고 지급‧결제 시장에서의 주도권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실제로 중앙은행의 권한이 약화되는 것은 곧 통화정책 집행력 약화와 맞닿아 있는 만큼 한은으로서는 제도 도입을 받아들이는 것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은은 “당분간 규제 수준이 높은 은행권 중심 발행을 우선 허용하고, 충분한 안전판을 갖춘 뒤 점차 확대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며 “미국의 ‘지니어스 법률’처럼 범부처 협의기구를 통해 발행 인허가를 엄격히 심사하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스테이블코인이 가진 혁신성을 유지하면서 통화정책, 금융안정, 외환시장 등에 미치는 잠재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도입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재희 기자
onej@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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