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지주 회장들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과 잇따라 접촉하며 제도화보다 한발 앞서 움직이고 있다. 아직 규제 틀이 마련되지 않았지만, 신사업 방향 모색과 시장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양종희 KB금융 회장은 오는 24일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테더(Tether)의 미국 특화법인 ‘테더 USAT’ 보 하인스(Bo Hines) 대표와 만난다. 당초 22일 만날 예정이었으나 테더 측 일정 문제로 회동이 연기됐다. 양 회장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와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 하인스 대표는 미국 행정부에서 디지털자산 규제 작업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대통령 디지털자산 자문위원회 집행이사를 역임한 만큼 무게감이 다르다는 평가다. 이번 만남이 단순한 회동을 넘어 전략적 협력의 시발점이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KB금융 측은 국내외 디지털 자산 규제 환경 변화에 대응한 스테이블코인 사업 기회 발굴과 글로벌 디지털 금융 서비스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실질적인 파트너십 구축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른 금융지주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금융지주 회장으로는 유일하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테더(Tether)와 서클(Circle) 주요 경영진과 잇따라 회동했다. 지난달 22일 히스 타버트(Heath Tarbert) 서클 사장을 만났고 지난 8일에는 테더의 마르코 달 라고(Marco Dal Lago) 부사장, 퀸 르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괄, 안드레 킴 중남미 지역 매니저 등과 자리를 가졌다.
진 회장은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한 디지털 자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업 진출 의지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지난 8일 ‘한·일 금융협력 세미나’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채권은 금융시장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금융산업 전반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전환금융과 디지털 채권시장의 구축에 힘을 보태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일 ‘창립 24주년 기념 행사’에서도 “스테이블코인 관련 생태계 기술 맵은 현재 부재한 상태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기술의 내재화와 이해도 확산”이라고 했다.
실제 신한은행은 기본적인 테스트도 마친 상태다. 최근 한·일 국경 간 스테이블코인 송금 프로젝트 ‘프로젝트 팍스(Project Pax)’ 1단계 기술 검증을 수행했다. 이번 기술 검증에는 신한은행을 비롯해 일본 측 주관사 프로그맷, 데이터체인과 한국의 페어스퀘어랩·한국디지털자산수탁(KDAC), NH농협은행, 케이뱅크가 참여했다.
기존 은행망은 그대로 두고 국경 구간에만 스테이블코인을 적용하는 ‘샌드위치 모델’을 시험해 송금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음을 확인했다. 다음 단계에서는 SWIFT 연동과 실거래 확대까지 검증한다는 계획이다.
금융지주들이 법제화도 전에 움직임을 보이는 이유는 신사업으로서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다는 점과 글로벌 사업에 있어서 필수적인 흐름이 됐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스테이블 코인이 해외송금과 무역결제 수요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는 만큼 국내 금융사들 역시 거스를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시장에서도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가 늘면서 본국 송금 수요도 늘었는데,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는데 효율적이라는 평가다. 기존 해외 송금은 5일 정도 소요되고 수수료도 1~2% 수준인데, 스테이블코인은 하루 만에 송금이 가능하며 수수료도 기존 은행 송금보다는 낮다. 기업 결제 역시 절차가 단순해지고 실시간 처리가 가능하다.
다만 금융지주들은 당장 사업화보다는 ‘검토 단계’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제도화가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앞서 나설 이유가 없어서다. 관련 법안이 발의된 상태지만 금융위원회 주도의 정부안은 10월에나 돼야 나올 전망이다.
특히 은행 중심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과 비은행까지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면서 스테이블코인 도입 주체를 두고 논란이 지속되는 점도 부담이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정책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하게 사업화하는 곳은 없을 것”이라며 “세계 시장의 큰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차원에서 협력 논의와 기술 검증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재희 기자
onej@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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