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금융사고 발생 시 임원진 책임까지 따지는 ‘책무구조도’가 내달 보험업권에도 본격 적용되기 때문이다. 사고 발생 시 고위 임원까지 제재가 가능해 제도 시행을 앞두고 보험사가 분주하다.
26일 보험업권에 의하면 내달 3일 자산 5조원 이상 보험사에 책무구조도가 도입됨에 따라 회사들이 내부통제체계 정비를 비롯해 인사 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지난 1분기 기준 자산 5조원 이상 보험사는 생명보험사 20곳, 손해보험사 10곳이다.
책무구조도는 금융사고 발생 시 각 단계별 책임 주체를 명시한 문서다. 산업안전 분야 중대재해처벌법이 안전사고 발생 시 경영책임자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처럼, 금융사고 발생 시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임원진에 대한 처벌도 가능하도록 했다.
시장에서는 책무구조도가 향후 대주주 적격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현행법상 금융사 대주주는 최근 5년간 금융관련법, 공정거래법, 조세범처벌법 등 위반으로 벌금형 이상 형사처벌을 받은 사실이 없어야 한다. 책무구조도 위반으로 대표이사가 처벌받을 경우, 향후 자회사 인수나 신사업 추진 과정에서 대주주 자격에 결격 사유가 발생할 수 있다.
이사회 내 통제기능 세분화… 이사·감사 신규 선임 러시
이달 메리츠화재, NH농협생명, 라이나생명 등은 지배구조 내부규범을 개정. 이사회 권한과 공시요건을 강화했다. 이사회 차원 내부통제 책임을 명확히 하려는 조치로 분석된다.
보험업권 지배구조 내부규범 개편은 지난해 당국의 지침에 따라 지속 진행되는 추세다. 지난 3월 생명보험사 11곳과 삼성화재, DB손보, 한화손보 등도 책무구조도 시범운영이 시작된 4월 전 내부규범을 손질했다.
지난 3월 삼성화재, DB손보, 현대해상의 경우 이사회 내 내부통제위원회를 신설하고, 주요 임원의 임면 체계를 재정비했다. 같은 기간 삼성생명도 기존 내부통제위원회 관련 규정을 개정하는 등 위원회 단위로 상품판매, 리스크 관리, 준법감시 기능을 세분화했다.
보험사들은 주요업무집행책임자(CRBO) 및 감사위원을 새롭게 임명하는 데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단순 인사 조정 차원을 넘어, 실제 사고 발생 시 ‘누가 책임지는가’를 제도적으로 특정해야 한다는 당국 방침에 대응한 조치로 풀이된다.
실제 금융당국은 책무구조도 컨설팅 과정에서 실무 분장과 책임 귀속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을 제기했다. 관(官) 출신 인사를 대거 등용하면서 사전 리스크 관리에 나섰다.
삼성생명은 지난 3월 구윤철 서울대 특임교수를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구윤철 이사는 문재인 정부에서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을 지냈다. 기획재정부에서 2차관을 역임한 경제관료 출신이다.
한화생명 지난 2월 위험관리집행책임자(CRO)로 박수원 상무를 선임, 내부통제 라인을 정비했다. NH농협생명은 지난 19일 KDB생명 대표를 지낸 정재욱 세종대학교 교수를 감사위원에 선임했다.
현대해상은 지난 3월 도효정 율촌 변호사를 감사위원으로 신규 선임했다. 도효정 변호사는 40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금감원 손해보험검사국, 보험감독을 거쳤다.
DB손해보험도 같은 기간 정채웅 사외이사를 선임사외이사로 임명했다. 정채웅 사외이사는 재정경제부 대외협력대사실 과장, 보험개발원장, 법무법인 광장 고문을 역임했다.
KB손해보험은 지난달 감사업무 총괄 임원으로 김철영 전 금융감독원 국장을 재선임했다. 내부통제 기능 강화를 위한 실무형 인재 배치로, 감독당국과의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고려된 것으로 분석된다.
한화손해보험은 유광열 전 금감원 수석부원장을 지난 3월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유광열 전 수석부원장은 기획재정부 국제금융협력국장,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장, 서울보증보험 대표 등을 역임했다
“임직원 책무감 제고… 경영 위축 방지책 병행해야”
금융소비자 입장에선 사고 발생 시 ‘누군가 책임지는 구조’가 생겼다는 점에서 반길 만하다. 하지만 제도 정착까지는 진통이 예상된다. 책무구조도 도입으로 사후 책임 소재가 명확해졌지만, 임직원 인식 변화가 따르지 않으면 시스템은 무력화될 수밖에 없어서다.
임원의 책무감을 강화하면서도 점진적으로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는 세부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시각이 제기된다. 금융사고의 근본원인과 행동 유발요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소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제언이다.
황용식 세종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책무구조도 도입이 당장 금융사에 부담이 될 수 있지만, 그간 느슨해진 기강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다만, 금융사고 우려 등으로 상품 출시나 경영활동에 위축이 될 소지도 있어 해당 방안에 대한 고려도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전대현 기자
jdh@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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