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TV·디스플레이 투자 청사진이 흐릿하다.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가 투자에 대한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고 보수적 자세로 일관하고 있어서다. 당분간 소극적인 투자로 일관하겠다는 양사의 암묵적 합의로도 읽힌다.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할 투자보다 단기 실적만 우선시하는 경영 풍조가 자리잡은 것이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4일 삼성은 향후 5년간 국내외 반도체·바이오·신성장IT 분야에 450조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TV 사업을 담당하는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VD) 사업부가 중심이 된 투자 계획은 보이지 않았다. 정체기를 겪는 TV시장에서 투자를 통한 정면돌파 보다는 현상유지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TV용 디스플레이 제품을 만드는 삼성디스플레이의 상황도 다를 것 없다. 삼성디스플레이는 2019년 10월 QD디스플레이(QD-OLED) 생산시설 구축과 연구개발에 모두 13조1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현재까지 3조원쯤만 투입했을뿐 추가 투자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양측의 투자가 답보 상태에 머무른 것에는 삼성전자 VD사업부장을 겸하는 한종희 DX부문장(부회장)과 최주선 삼성디스플레이 사장의 보수적 성향이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다.

삼성전자 VD사업부와 삼성디스플레이는 모두 실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종희 부회장을 현재 위치로 이끈 VD사업부는 지난해 LCD 가격 급등 여파에 수익 악화로 체면을 구겼다. 비스포크를 내세운 생활가전사업부에 사실상 얹혀가는 신세였기에 올해 실적개선이 절실한 입장이다.

2021년부터 삼성디스플레이를 이끄는 최주선 사장의 부담감도 못지 않다. 디스플레이 업계에서는 전임 이동훈 사장이 2020년을 끝으로 용퇴한 이유를 연이은 실적 부진에 따른 것으로 해석한다. 이를 지켜봐온 최 사장이 선제 투자를 더욱 꺼려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그간 양사가 맺은 QD디스플레이와 LCD 패널 공급계약도 과감한 결단보다는 실적 영향을 최소화 하기 위한 보수적 경영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초 최주선 사장은 삼성전자에 2022년 말까지 LCD 공급을 지속하는 방안을 내걸었다. 당시 자사 QD디스플레이 패널을 삼성전자가 적극 채용해야 한다는 조건의 결과물로 해석됐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 LCD 가격이 폭락한 후 상황이 달라졌다. 삼성전자로선 TV 시장점유율 30%대를 지키기 위해 OLED TV를 무리해 도입할 필요성이 없어졌다. 삼성전자의 QD디스플레이를 향한 반응이 최근 시큰둥해진 이유다.

QD디스플레이는 최근 수율이 빠른 속도로 개선되고 있음에도, ‘계륵(큰 쓸모나 이익은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움)’ 같은 존재가 됐다. 삼성전자는 생산능력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주력 TV에서 QD디스플레이를 제외했고, 삼성디스플레이는 최대 고객사가 QD디스플레이 도입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추가 투자에 나서지 않고 있다.

이같은 기조는 차세대 기술인 ‘퀀텀닷나노로드발광다이오드(QNED)’를 적용한 TV를 빠른 시일 내 상용화하려는 삼성전자의 시나리오에도 영향을 미쳤다. 삼성디스플레이는 1분기 QNED 시제품 생산 라인을 구축할 예정이었지만 일정을 연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두를 것 없다는 양측의 소극적 태도가 미래 사업 경쟁력 확보에는 악재로 작용한 셈이다.

삼성전자를 상징하는 단어는 ‘초격차’였다. 하지만 관계사 간 눈치만 보며 현상유지에 급급한 사이 삼성의 대형 스크린 사업은 과감한 혁신이 사라졌다. 기술 초격차는 점점 좁혀져 향후 글로벌 경쟁력을 우려하게 만든다.

앞서 이재용 부회장은 2020년 8월 충남 아산 탕정사업장을 방문해 "지금 LCD 사업이 어렵다고 해서 대형 디스플레이를 포기해선 안 된다"며 "신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 새로운 미래를 선도해야 한다"고 밝혔다. ‘눈앞의 실적보다는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라’는 오너 경영인의 메시지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한종희 부회장과 최주선 사장은 과거 삼성의 혁신을 이끈 대표 CEO다. 이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미래를 위한 과감한 결단에 나서야 할 때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