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혁신을 추진하다가 사고가 나면 다시 규제를 강화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시대를 역행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죠. 금융혁신도 안정에 바탕을 둬야 하는 이유입니다.”

고승범 청소년금융교육협의회 회장이 IT조선과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금융안정 바탕 위에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전대현 기자
고승범 청소년금융교육협의회 회장이 IT조선과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금융안정 바탕 위에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전대현 기자

고승범 청소년금융교육협의회 회장은 IT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우리 금융시장과 금융산업이 주목해야 할 가치는 안정과 균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금융위원장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실물은 물론, 거시 금융정책까지 모두 다뤄본 그는 수차례의 경제 위기를 겪으며 시스템과 신뢰, 규율의 중요성을 절감했다는 설명을 거듭 강조했다.  

기술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지만 자본의 흐름을 지켜내는 금융시스템이 무너지면 혁신도 꽃피울 수 없다는 게 고승범 회장의 지론이다. 청소년 금융교육이 중요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혁신이 중요하긴 하지만 안전한 토대 위에서 이뤄져야 하는 만큼, 미래 우리사회를 이끌고 나가야 하는 청소년들이 금융에 대한 기초를 충분히 다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는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일상이 된 시대에 금융에 대한 기초적 이해 없이 사회에 나서는 것은 무방비 상태로 전장에 뛰어드는 것”이라며 ”안정과 혁신의 균형, 그리고 그 속에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교육의 필요성이야말로 금융이 지켜야 할 본질”이라고 말했다.

고 회장은 이달 17일 여의도에서 열리는 IT조선 디지털금융포럼에서 ‘금융시장 안정과 금융산업 발전 과제’를 주제로 기조연설에 나선다. 

다음은 고승범 회장과의 일문일답.

ㅡ 금융위원장과 한국은행 금통위원을 역임했다. 금융당국의 최고위 직을 두루 경험한 셈인데 금융산업에 대한 이해가 남다를 듯하다.  

“금융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봤으면 한다. 금융의 핵심 미션은 시장 안정과 산업 발전을 통해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금융위원회 설치법 제1조에도 명시된 내용이다.

금융위원회와 한은 금통위원으로 일할 당시에도 항상 ‘금융안정’의 중요성을 원칙처럼 강조해왔다. 금융이 불안정하면 어떤 투자나 혁신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융 안정이 담보돼야 성장도 가능하다.”

ㅡ금융안정이라는 말은 한편으론 규제를 강화하라는 메시지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분위기라면 시장이 위축될 수도 있지 않나.   

“금융발전이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학계에서도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실제로 GDP 대비 총유동성 비율 같은 지표로 계량 분석을 시도한 연구들이 많다.

하지만 유동성이 늘어난다고 해서 무조건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오는 건 아니다. 예컨대 남미 국가들은 금융 자유화로 해외 자본을 대거 유입시켰다. 하지만, 미국의 금리 인상기에 취약해지며 위기를 겪었다.

한국은 ‘금융 억압 정책’을 통해 빠르게 성장한 예외적인 사례다. 금융산업 발전이 반드시 규제 완화나 유동성 확대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고승범 회장은 안정과 혁신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전대현 기자
고승범 회장은 안정과 혁신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전대현 기자

ㅡ금융안정을 우선시 하다가 혹시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는 건 아닌가.  

“무조건 다 막으라는 게 아니다. 금융발전은 제도적 측면뿐 아니라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금융위원회가 업권별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ㅡ시장의 혁신이 있어야 경제도 발전하는 것 아닌가. 이를 위해 금융산업에도 다양한 실험들이 필요할 거라 보는데.

“중요한 건 균형이다.

금융산업의 발전이 반드시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온다고 보긴 어렵다. 체케티(Cecchetti)나 카루비(Kharroubi) 같은 학자들 연구에 따르면, 금융이 발전하면서 유동성과 부채가 늘어나는 구간에서는 경제성장률이 오르지만, 일정 임계치를 넘으면 오히려 성장률이 하락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금융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파생상품이 지나치게 확장된 결과였다. 그때처럼 혁신만을 강조하다 보면 오히려 금융 시스템이 흔들릴 수 있다. 반대로 금융 안정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혁신이 막히고, 결국 경제 전반의 활력이 떨어지게 된다. 균형이 필요하다는 이유다.”

ㅡ최근 AI나 디지털 전환, 핀테크 등 금융 혁신이 주목받고 있다. 이 흐름은 어떻게 보고 있나.

“디지털 전환과 AI 활용은 금융산업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핵심 축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금융안정 없이 혁신만 강조하면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그랬다. 파생상품 시장의 무분별한 확장, CDO(부채담보부증권) 같은 구조화 금융 상품들이 결국 위기의 기폭제가 됐다. 

그러니 혁신도 금융안정 위에 서야 한다. 동일 기능, 동일 규제 원칙을 강조했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당시)핀테크 업계에서 반발도 있었지만, 규제 형평성과 시장 안전은 양립할 수 밖에 없다. 규제를 지나치게 완화했다가 사고가 나면 다시 강화하고, 그럼 또 혁신이 위축되는 악순환을 언제까지 반복할건가.”

ㅡ가계대출을 비롯해, 부채 문제가 심각하다. 금융위원장 시절부터 부채문제 해결을 강조해 왔다. 

“과도하게 빚내서 투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는 지름길이다. 한국은행도 가계부채 비율이 60~80%를 넘을 경우 경제성장률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금융이 발전해도 가계 부채나 기업 부채가 일정 임계치를 넘어서면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하락한다.”

ㅡ우리 경제가 장기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금융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나.

“한국은행과 KDI도 잠재성장률 하락의 원인을 구조적 요인에서 찾고 있다. 고령화, 저출산, 생산성 저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이 맡아야 할 역할은 분명하다. 건전한 금융중개 기능을 통해 기업의 생산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이고, 산업 혁신을 촉진해야 한다.”

금융위원장을 역임했던 고승범 청소년금융교육협의회 회장이 2022년 7월 금융위를 떠나며 직원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다. /뉴스1
금융위원장을 역임했던 고승범 청소년금융교육협의회 회장이 2022년 7월 금융위를 떠나며 직원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다. /뉴스1

ㅡ지금 청소년금융교육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회장을 맡게된 배경이 있나.

“과거 신용카드 사태 당시 해당 사안을 담당했던 과장이었다. 그때 과도한 신용 남용으로 인해 수많은 청년들이 신용불량자가 되는 걸 직접 목격했다. 2003년 그 사태를 계기로 청소년 금융교육협의회가 만들어졌다.

금융에 대한 기초 지식 없이 사회에 진입하는 것은 개인에게도, 국가 경제 전체에도 위협이 된다. 최근 한국은행과 금감원의 조사에 따르면, 청년층의 금융 이해력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협의회 회장을 맡은 건 그런 문제의식 때문이다. 실질적인 금융 교육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ㅡ청소년 금융교육은 중요하지만 당장 수능이 먼저인 아이들이다. 어떻게하면 실질적인 금융교육이 가능할까.

“중요한 문제다. 현재 청소년 대상 금융 교육 과목이 만들어졌지만, 수능과 연계되지 않다 보니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청소년금융협의회가 지난해 20만명이 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을 했지만 이는 전체 초중고학생의 3.6% 수준에 그친다. 

특히 금융이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임을 인식시켜주는 게 중요하다. 전세 사기, 빚투, 가상자산 투자로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의 사례를 보면 절실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청소년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 그때가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ㅡ실질적인 교육대안을 마련한다면.

"교육부, 금융당국, 민간기관이 유기적으로 협력해 커리큘럼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고, 학습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올해는 수학과 접목한 금융교육과 부모가 자녀  금융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예정이다.”

☞고승범 청소년금융교육협의회 회장은

1962년생으로 경복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에서 행정학 석사, 미국 아메리칸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 28회로 공직에 입문, 금융위원회에서 금융정책국장, 사무처장, 상임위원을 역임하며 가계부채와 자본시장, 기업구조조정 관련 정책을 총괄했다. 1998년 외환위기, 2003년 신용카드 사태,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때 해당 업무를 담당하며 위기 극복을 도왔다. 2016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에 선임돼 한차례 연임에 성공했으며 2021년 제8대 금융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한재희 기자
onej@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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